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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다른 것이 들어갔군

[2화 — 다른 것이 들어갔군]

문고리는 놋쇠였다.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놋쇠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멈칫하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빛을 바라보는 여자

손가락이 가늘었다. 손톱은 누가 다듬어 놓은 것처럼 둥글고 매끈했다. 나는 손톱을 다듬어 본 적이 없다. 그럴 시간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남의 손으로 남의 문을 여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밀었다. 문은 무겁지 않았다.

커피 냄새가 먼저 왔다. 그다음이 나무 냄새, 그다음이 종이 냄새. 천장까지 닿는 책장, 낮게 켜진 등, 어두운 색 나무 탁자 몇 개. 카페라기보다 누군가의 서재 같았다. 서른네 해 살면서 이런 데 앉아본 적이 없다. 이런 데는 나 같은 사람이 오는 데가 아니었다. 그래서 편해야 할 그 아늑함이 오히려 불편했다.

카운터 안쪽에 남자가 하나 있었다. 잔을 닦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 음?? 어떻게 문을 찾은 거지?"

"네??"

이상한 인사였다. 어서 오세요도 아니고, 문을 찾았냐니.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보는데 나를 보는 게 아닌 것 같은 눈이었다. 서늘한 눈. 잘생겼다는 생각은 한 박자 뒤에 왔다. 그보다 먼저 온 건, 내가 뭘 잘못했구나 하는 감각이었다.

"죄송해요. 아직 영업을 안 하는 건가요? 새로 생긴 거였나? 공사 중이었나…"

그런 표시는 없었는데. 밖에서 봤을 땐 분명 불이 켜져 있었는데. 나는 말끝을 흐리며 뒷걸음질쳤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잘못 들어온 곳에서 조용히 빠져나오는 것. 그런 건 잘한다.

카운터 너머에서 잔을 닦다 고개를 든 남자와, 미안한 얼굴로 뒷걸음질치는 여자

"거기 조심…"

"어어~~"

뒤꿈치가 문턱에 걸렸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 몸은 내 몸보다 가벼워서 넘어가는 것도 빨랐다.

그런데 바닥에 닿지 않았다.

허리춤에 손이 들어와 있었다. 남자였다. 카운터 안에 있던 남자가 어느새 내 앞에 있었다. 뛰어왔다고 하기엔 소리가 없었고, 걸어왔다고 하기엔 거리가 말이 안 됐다. 날아왔다.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됐다.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운 속도였다.

눈이 마주쳤다.

넘어지는 여자의 허리를 받아 안고 눈을 마주친, 옆얼굴이 서늘하게 잘생긴 남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눈을 피했다. 서른넷이나 먹어서, 남자가 허리 한 번 잡아줬다고 얼굴이 빨개지다니. 이 몸이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그 짧은 사이에—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른 것이 들어갔군."

무슨 뜻인지 물을 틈도 없었다. 남자는 나를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어깨부터 떨어졌다. 아팠다. 아픈 것보다 놀란 게 컸다. 방금까지 나를 받아주던 손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올려다보는 여자를 차갑고 귀족적인 얼굴로 내려다보는 남자

"넌 누군데 그 아이의 몸에 들어간 거냐!"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아니, 화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소리에 실내 공기가 한 번에 무거워졌다. 등이 흔들린 것 같기도 했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무서웠다. 이유를 댈 수 없이 무서웠다. 서른넷 먹은 어른이, 처음 보는 카페 바닥에 주저앉아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전세금을 날렸을 때도 안 울었다. 중환자실 유리창 앞에서도 안 울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소리를 지르니까, 울 것 같았다. 목구멍이 막혔다.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때는 몰랐다.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를 앞에 두고 꼿꼿이 선 남자의 전신

"은우군 진정하세요."

2층 계단 쪽이었다. 맑고 청아하고, 어디 하나 흔들리는 데 없이 안정된 목소리였다. 천사의 목소리가 있다면 이런 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막혔던 목구멍이 그 소리 하나에 풀렸다.

"여성분이 놀라잖아요, 은우군. 이분도 원해서 이리 된 것이 아닐 겁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둘이었다. 앞은 어딘가 앳돼 보이는 얼굴의 남자였다.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다. 그 뒤로 수하처럼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따라 내려왔다. 그도 한복이었다. 카운터의 남자도, 이제 보니 개량한복 같은 걸 입고 있었다. 컨셉 카페인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환한 빛 속에서 미소 지으며 이층 계단을 내려오는 한복 차림의 남자와 뒤를 따르는 건장한 남자

앳된 남자가 내 앞으로 왔다. 걸어왔다기보다 스르륵 흘러온 것 같았다.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주고는, 빙긋 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무서워서 울 것 같았는데, 그 웃음 하나에 마음이 어딘가 모르게 편해졌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편해졌다.

"반가워요, 지안씨. 나는 이곳 카페 퀀타로의 주인장 차우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바리스타 문은우씨. 그리고 나를 따라 내려온 이 건장한 친구는 최건우씨입니다."

"반갑습니다. 지안씨, 최건우입니다."

건장한 남자는 그 한마디만 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목소리는 낮았고 표정은 없었다.

나는 세 사람을 차례로 봤다. 이곳의 남자들은 모두 각자의 매력이 넘치는, 진짜 잘생긴 사람들이었다. 그런 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닌데.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 자꾸 엉뚱한 데 눈이 갔다. 아니면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데 여태 볼 일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는데, 문은우가 고개를 잠시 숙이는 듯하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대표님, 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니,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닙니다! 당장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

그 말이 몸 어딘가에 박혔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라는 말은 내가 중환자실 유리창 앞에서 스스로 했던 말이었다.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아는지보다, 그 뒤에 붙은 두 글자가 더 크게 들렸다.

"은우군, 진정하래도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차우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왔다면 그것 역시 신의 뜻이겠지요. 그녀는 악귀가 아닙니다. 원혼도 아니구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잠시 다른 몸에 들어오게 된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찾아줘야 합니다."

문은우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마침 은우군이 이번 주 내내 비번이기도 하니, 그녀를 도와서 원인을 찾아보면 되겠네요."

"네???!!! 그게 무슨…"

"은우군."

한마디였다. 목소리가 커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은우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이를 악문 채였다. 나는 그걸 보면서 이 카페의 서열을 알았다.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지안씨, 앉으세요. 서 있으면 다리가 떨립니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앉았다. 나무 의자는 차가웠고, 이내 따뜻해졌다.

최건우가 잔을 하나 내려놓고 갔다. 말은 없었다. 커피였다. 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남의 손으로 남의 잔을 드는 건 아직 무리였다.

말없이 탁자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건장한 남자의 손과 상체

차우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문은우는 카운터 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둥 옆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 방금 허리를 잡아줬던 손으로 팔짱을 끼고, 방금 나를 내던졌던 눈으로.

나는 물었다. 돌려 말할 힘이 없었다.

"제가 왜 이 꼴이 된 거예요."

"그건 지안씨가 찾아야 할 겁니다."

"돌아갈 수 있어요?"

"그것도요."

차우진은 웃는 얼굴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게 왔다.

"이 문은 아무나 보는 문이 아닙니다. 지안씨가 이 문을 봤다는 것, 그게 첫 번째 단서예요."

문. 어제까지 없던 문. 나만 보이던 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나는 이 사람들한테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반가워요, 지안씨. 처음부터 그렇게 불렀다. 이 몸의 이름도 아니고, 내 이름으로.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차우진이 먼저 말했다.

"오늘 밤 갈 곳은 있습니까?"

없었다. 이 몸의 집이 어딘지 모른다. 내 고시원 열쇠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여자의 가방 안에 있다. 갈 데가 없다는 건 익숙한데, 이번엔 그 익숙함이 하나도 위로가 안 됐다.

차우진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지안씨."

"…네."

"지안씨 잘못이 아닙니다."

옆자리에 앉아 다정하게 바라보는 한복 차림의 남자와, 눈가가 젖은 여자

그 말에 뭔가가 무너졌다. 전세금 날렸을 때 아무도 안 해준 말이었다. 계단에서 굴렀을 때도, 중환자실 유리창 앞에서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나조차 안 했다. 나는 늘 내 탓을 먼저 했다. 재수가 없는 것도 결국 내 팔자니까.

"어떤 이유든, 지안씨가 만든 이유는 아닐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안심하세요. 여기서는 아무도 지안씨를 해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둘 겁니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아까와는 다른 눈물이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누가 내 편이라고 말해줘서. 서른네 해 동안 없던 종류의 말이었다. 나는 이 앳된 얼굴의 남자에게, 그 자리에서 기대고 싶어졌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마음인지는 그때 몰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습니다. 은우군이 도울 겁니다."

기둥 옆의 남자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차우진은 그걸 보고도 웃으며 일어났다.

"저는 올라가 보겠습니다. 은우군, 부탁해요."

"…예."

차우진이 계단을 올라갔다. 최건우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카페 안이 갑자기 넓어졌다. 남은 건 나와, 나를 내던졌던 남자뿐이었다.

침묵이 길었다. 나는 잔을 만지작거렸고, 문은우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봤다. 아까 허리를 잡았던 손, 아까 소리를 질렀던 목소리. 그 사람과 단둘이 앉아 있으니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랐다.

먼저 입을 연 건 그쪽이었다.

"그래서 여기 계속 있겠다는 거냐?"

"…아니요, 그게…"

"갈 데는 있고?"

없다고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없다는 게 얼굴에 다 쓰여 있었던 모양이다. 문은우는 한숨인지 혀 차는 소리인지 모를 걸 내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카드였다. 한 벌. 그는 그걸 손 안에서 섞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하기 싫은 걸 하는 사람의 손놀림이었는데, 손은 이상할 만큼 빨랐다.

한복 소매 밖으로 나온 손이 빈 카드 한 벌을 빠르게 섞는 모습

"지금 떠오르는 번호 세 개를 불러."

"…네?"

"세 개. 아무거나."

갑자기??? 뭐 하자는 거지? 나는 그를 봤다. 그는 카드만 봤다.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얼떨결에, 떠오르는 대로 불렀다.

"…열일곱. 서른넷. 삼."

내 나이가 섞여 나온 건 나중에야 알았다.

문은우의 눈에서 빛이 났다.

푸른 빛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눈동자 안쪽에서 푸른 것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 안에서 섞이던 수십 장의 카드 중 세 장이 같은 푸른색으로 발광하더니, 스르륵, 공중으로 떠올랐다. 세 장은 허공에서 서로 뒤섞였다. 누가 젓는 것도 아닌데 뒤섞였다. 그러다 한 장씩, 천천히 뒤집히며, 내 앞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푸르게 빛나며 탁자 위로 떠오른 카드 세 장과, 카드 빛에 눈동자가 푸르게 켜진 남자

나는 숨도 못 쉬고 그걸 봤다.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 이상한 일은 많이 겪었는데, 눈앞에서 카드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문은우는 세 장을 내려다봤다. 첫 장, 둘째 장. 표정이 없었다. 셋째 장에서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탁자 위 셋째 카드를 내려다보며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인 남자의 얼굴

"일단 맞바뀐 곳으로 돌아가라."

"…네?"

"원래 몸이랑 맞바뀐 곳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잘 곳이 생길 거다. 그 몸에 대한 것도, 그곳에 가면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계단. 고시원 계단. 나는 되물으려다 그의 다음 말에 막혔다.

"너의 마음이 안 되었… 음… 되었다. 쓸데없는 것까지 봐버렸군."

"…뭐가요?"

"어서 가버려라. 나와는 때가 되면 알아서 보게 될 테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문은우는 카드를 쓸어 담더니 일어나 나를 가게 밖으로 떠밀었다. 등을 밀렸다. 문이 열리고, 찬 공기가 얼굴에 닿고, 나는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돌아보니 그는 문간에 서서 마치 파리를 쫓듯 훠이훠이 팔을 휘저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길모퉁이에 선 여자와, 문간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가게 문이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다. 놋쇠 간판도, 문틈의 불빛도, 나무문도. 편의점과 닫힌 세탁소 사이엔 아까처럼, 어제처럼, 아무것도 없는 벽만 있었다.

편의점과 닫힌 세탁소 사이, 문이 사라진 빈 벽 앞에 선 여자의 뒷모습

꿈을 꾼 건가.

그러기엔 하얀 피부와 얇은 팔목,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손바닥을 펴봤다. 다듬은 손톱. 남의 손. 꿈이 아니었다.

신기한 사람들이었다. 신기한 사람들이니, 그 말대로 해보자. 다른 수도 없었다.

밖은 신기하게도 비가 멎어 있었다. 나는 그 길로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

계단은 그대로였다. 어제 내가 구른 계단. 물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복덕방 아저씨가 붙여둔 「계단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요」 종이가 반쯤 떨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섰다.

여기서 뭘 하라는 거지.

잘 곳이 생긴다고 했다. 내 방은 저 위에 있는데 열쇠가 없다. 이 몸의 방은 어딘지도 모른다. 멍하니 서서 계단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기요~"

뒤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봤다.

웬 남자애였다. 중3쯤 돼 보였다. 교복 위에 후드를 걸쳤고, 손에는 휴대폰 하나와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애는 그걸 나한테 내밀었다.

"이거 누나 꺼죠? 아까 누나 병원 갈 때 누가 훔쳐갈까 봐 제가 챙겨놨었어요."

가방과 휴대폰을 내미는 얼굴 붉힌 남학생과, 그것을 받는 여자의 뒷모습

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누나. 이 얼굴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이 몸이 어제 여기서 구를 때, 이 애가 봤다는 거였다.

"어? 어… 고마워."

나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남자애는 쑥스러웠는지 뭐라 더 말하려다 말고, 서둘러 어딘가로 달려갔다. 계단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골목 쪽으로. 뒷모습이 금방 사라졌다.

손에 든 가방은 가벼웠다. 여자애들이 드는 작은 크로스백이었다. 나는 그런 가방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열어봤다.

지갑, 립밤, 이어폰. 그리고 열쇠 하나. 열쇠고리에 하얀 테이프가 감겨 있고, 거기 매직으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307.

고시원 방 번호였다. 이 고시원의 방 번호 마킹 방식이었다. 나는 208호였다. 내 방 바로 위층이었다.

이 여자는, 여기 살았다.

계단에서 부딪힌 게 아니라 같은 건물에 살던 사람이었다. 반년을 하루 두 번씩 오간 계단에서, 한 번도 마주친 기억이 없는 사람. 아니, 마주쳤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남의 얼굴을 잘 안 봤다. 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잘 곳이 생길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이거였다.

계단을 올랐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복도 끝에서 두 번째, 307. 열쇠가 들어갔다.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내 방과 같은 크기였다. 그런데 정반대인 방이었다.

내 방은 반년 동안 짐만 쌓였다. 이 방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살아도 아주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벽 한 면이 종이였다. A4 용지를 이어 붙여 만든 달력에 볼펜 글씨가 빽빽했다. 「○○치킨 7시」 「마트 개업식 11시」 「노인정 위문」 「축제 지원서 — X」 「축제 지원서 — X」 「연습실 06:00」. 동네 이름들이었다. 방송국이나 큰 무대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빈칸이 거의 없었다. 어제 날짜에도 「○○치킨 7시」가 있었고, 그 옆에 작게 「끝나고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옷걸이엔 비닐 씌운 옷이 한 벌 걸려 있었다. 반짝이는 천이었다. 무대에서 입는 옷. 소매 안쪽이 다른 색 실로 꿰매져 있었다. 누가 직접 고친 거였다. 그 아래 바닥엔 운동화 두 켤레. 한 켤레는 밑창이 반쯤 닳았고, 한 켤레는 새것인데 상자째였다. 아끼는 거다. 나도 그런 식으로 신발을 아꼈다.

작은 방 옷걸이에 걸린 반짝이는 무대 의상과, 종이를 이어 붙여 만든 벽의 달력

책상은 화장품이었다. 드럭스토어에서 파는 게 아니라 종류가 다른 것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런 건 방송하는 사람들이 쓰는 거 아닌가. 그 옆에 밴드 한 통, 발목 테이핑 한 롤, 물집 약. 그리고 노트 한 권.

노트를 펼쳤다. 가사였다. 손글씨로 쓴 노래 가사 위에 빨간 볼펜으로 줄이 그어지고 고쳐지고 또 고쳐져 있었다. 여백엔 「여기서 숨」 「고음 말고 낮게」 「막내 파트 바꿔줄 것」. 마지막 장엔 딱 한 줄이 있었다.

오늘도 무대 하나.

나는 노트를 덮었다. 이 방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노래하는 애구나. 노래하는데,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노래하는 애.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번엔 열어보기가 무서웠다. 열었다. 현금 몇 장, 교통카드, 그리고 신분증. 이름표를 봤다. 이 여자한테 이름이 있었다. 스물둘이었다. 열두 살 어렸다. 나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못했다. 남의 이름을 남의 입으로 읽는 게 이상하게 죄스러웠다.

휴대폰을 켰다. 잠금 화면. 비밀번호를 모른다. 그런데 화면을 들어 올리자, 잠금이 풀렸다.

얼굴. 이 얼굴이 열쇠였다.

알림이 쏟아졌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십 개였다.

「내일 연습 10시 늦지 마」

「사장님: 다음 주 ○○마트 확정. 페이 5만. 넷이 나눠라 미안하다」

「축제 측: 검토 결과 이번엔 함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막내: 언니 괜찮아요?? 병원 어디예요 ㅠㅠㅠ 전화 좀 받아요」

「막내: 언니」

「막내: 언니 제발」

부재중 전화 열아홉 통. 전부 같은 이름이었다.

사진첩을 열었다. 같은 옷을 입은 여자 넷이 있었다. 이 얼굴이 가운데였다. 무대라고 부르기엔 작은 단상,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열 명이 안 됐다. 그중 절반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넷은 웃고 있었다. 진짜로 웃고 있었다. 다음 사진도, 그다음 사진도. 무대는 매번 작았고 웃음은 매번 컸다.

나는 침대에 앉았다.

알고 있는 종류의 삶이었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혼자 새벽에 일어나는 거. 안 되는 걸 알면서 지원서를 또 내는 거. 신발 한 켤레를 상자째 아끼는 거. 나는 그렇게 스물둘을 보냈다. 알바를 세 개 뛰고 코피를 쏟으면서. 그때 내 방에도 이런 달력이 있었다. 무대 대신 알바 시간표였을 뿐.

그런데 나는 서른넷에 계단에서 굴렀고, 이 애는 스물둘에 나랑 부딪혔다.

이 애는, 어디 갔나.

그 생각이 처음으로 왔다. 병원에서도, 카페에서도 나는 내 걱정만 했다. 나는 어디 있지, 나는 돌아갈 수 있나. 이 몸의 주인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한 번도 생각 안 했다. 이 방을 보고 나서야 그게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 내일 아침 열 시에 연습실에 가야 하고, 막내한테 전화를 걸어줘야 하고, 다음 주 마트 개업식에 서야 하는 사람.

그 몸에 대한 것도, 그곳에 가면 답을 얻게 될 것이다.

답은 아니었다. 답 대신 빚이 하나 생겼다. 남의 몸을 빌린 게 아니라, 남의 하루를 통째로 빼앗아 온 것 같은 빚.

그리고 그 남자는 내 마음에서 대체 뭘 봤다는 건가. 안 되었다는 건지 되었다는 건지. 쓸데없는 것까지 봐버렸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나와는 때가 되면 알아서 보게 될 테니.

그 말이 자꾸 남았다. 문이 사라지던 것보다, 카드가 날던 것보다, 그 말이 제일 남았다.

휴대폰이 또 울렸다. 막내였다. 열아홉 번을 안 받은 전화였다. 스무 번째는 받아버렸다. 왜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언니 제발」이 눈에 밟혀서였을 거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어디예요 지금, 병원이에요? 사장님이 언니 계단에서 굴렀다고, 나 진짜…"

우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에서 나온 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내 목소리였다. 너무 내 것이라 문제였다.

"아이고, 야야, 울지 마라. 언니 괜찮다. 마 좀 굴렀다 아이가, 사람이 굴러도 살더라."

침묵.

"…언니?"

"와. 밥은 묵었나? 니 또 컵라면 묵었제? 내일 열 시 연습이제, 늦지 말고 일찍 자라. 언니 내일 보고 이야기하자, 응?"

"…언니 목소리가 왜…"

"와? 감기 걸맀나 보다. 끊는다, 자라. 문 잘 잠그고."

끊었다. 끊고 나서 한참을 휴대폰을 봤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서울 올라와서 회사 다니는 동안, 거래처 앞에서도 상사 앞에서도 한 번을 안 튀어나온 부산 말이었다. 그게 스물도 될까 말까 한 애 우는 소리 한 방에 다 튀어나왔다. 그것도 아무리 들어도 삼십 대 말투로. 알바를 열 개는 거치면서 우는 후배 달래던 그 말투 그대로. 밥 묵었나, 문 잘 잠그고. 이 애 언니가 아니라 이 애 이모 같은 소리를 해놨다.

막내한테서 문자가 왔다.

「언니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괜찮은 거 맞지, 그건 아닌데. 답을 안 했다. 그러고 나서 이불을 폈다.

남의 냄새가 났다. 땀 냄새와 파스 냄새와 싸구려 샴푸 냄새. 나는 그 냄새 속에서, 서른네 해 만에 처음으로 남의 침대에 누웠다.

재수도 없지.

그런데 그 말이, 오늘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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