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 회차 목록

제1화 — 재수도 없지

퀀타로 — 겹쳐진 당신에게

프롤로그

세상엔 하나의 미래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 앞엔 수십 갈래의 내일이 겹쳐 있다. 이직한 나와 그러지 않은 나. 연락한 나와 끝내 지운 나. 전부 동시에, 흐릿하게 포개진 채 흐른다.

한 사람 위로 반투명하게 겹쳐 흐르는 여러 갈래의 내일

대부분은 그걸 못 본다. 하루에 하나씩 눈을 감은 채 고르고, 고른 뒤에야 안다. 아, 그 길이 아니었구나.

그 겹쳐진 흐름을 읽어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관측자라 부르고, 그들이 모인 비밀조직의 이름은 — 퀀타리움.

단, 계율이 하나 있다.

관측하면, 확정된다.

들여다본 미래는 그 순간 하나로 굳는다. 그래서 그들은 함부로 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이건, 두 삶이 겹쳐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1화 — 재수도 없지

비가 왔다.

하필 우산을 안 챙긴 날이었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뭘 골라도 꼭 하나가 어긋난다.

서지안, 서른넷. 부산에서 서울까지, 남들 다 부러워하는 회사에 붙었다고 좋아했던 게 반년 전이다.

합격 문자를 받던 날을 아직 기억한다. 부산역 앞 버스 정류장이었다. 소리를 지를 뻔한 걸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고, 그날 밤 혼자 돼지국밥에 소주를 시켰다. 서른셋에 드디어, 라는 말을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드디어 풀리는구나. 드디어 나한테도.

그럴 만했다. 거기까지 오는 데 이십 년이 걸렸으니까.

중학교 때부터 전단지를 돌렸다. 고등학교 땐 편의점 야간에 주유소 주말 근무. 대학은 등록금 벌어가며 다녔다. 과외 두 탕에 식당 설거지, 새벽엔 도서관. 코피가 책상에 떨어지면 휴지로 막고 다시 문제를 풀었다. 남들은 그 나이에 여행을 갔고, 나는 그 나이에 시급을 셌다.

손 벌릴 데가 없었으니까. 할머니 집에서 먹는 밥은 밥이 아니라 빚이었다. 눈치라는 게 그렇다. 아무도 뭐라 안 해도, 숟가락 드는 소리까지 조심하게 된다. 그 집에서 나는 일찍 배웠다. 내 몫은 내가 벌어야 한다는 걸. 그 누구도 대신 벌어주지 않는다는 걸.

졸업하고는 부산의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서울 대기업에 부품을 대는 납품업체. 회사 이름을 대면 아무도 모르지만, 그 대기업 이름을 대면 다들 아는 회사. 명절 상여도 없고, 야근은 당연하고, 십 년을 다녔는데 월급은 처음 들어갈 때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녔다. 다니면서 월급을 쪼개 또 모았다.

그 십 년 사이에, 본사에서 파견 나온 임원 한 사람이 나를 눈여겨봤다. 납품 검수로 몇 달을 부산에 내려와 있던 사람이었다. 다들 대충 넘기는 서류를 나 혼자 끝까지 맞추는 걸 봤다고 했다. 그가 서울로 올라가고 두 해 뒤, 경력직 공고가 떴을 때 연락이 왔다. 지원해 보라고. 문을 열어준 건 그 사람이었지만, 그 문을 통과한 건 나였다. 서류, 필기, 면접 세 번. 그 사람은 어느 자리에도 없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었다. 십몇 년 동안 통장에 한 줄씩 쌓인 숫자. 굶어가며, 졸아가며, 코피 쏟아가며 모은 돈. 그 통장 하나 들고 서울에 올라왔고, 그게 전세 보증금이 됐다.

회사까지 지하철 두 정거장, 볕 잘 드는 오래된 빌라.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눈치 안 보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방. 계약하던 날 부동산 소파에 앉아 등기부등본이라는 걸 난생처음 한 줄 한 줄 읽었다. 깨끗하다고 했다. 문제없다고 했다. 집주인이라는 남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도장을 찍었다.

복덕방 책상에서 사람 좋게 웃으며 임대차 계약서에 빨간 인주 도장을 찍는 중년 남자

그 도장이 내 인생에 찍힌 거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집주인은 집주인이 아니었다. 서류 위에만 존재하는 이름이었고, 그 이름 뒤에 몇 명이 더 있는지는 경찰도 다 못 셌다. 같은 수법에 물린 사람이 그 빌라에만 아홉 세대였다. 다들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제 좀 살아보려던, 등기부등본을 난생처음 읽어본 사람들.

보증금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송은 하고 있다. 하고 있다는 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변호사는 길게 잡으라고 했다. 몇 년이 될지 모른다고. 그동안 회사는 다녀야 했고, 몸 누일 데는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남은 건 서울 끄트머리 고시원 한 칸. 창문도 없는 방.

보증금 없이 몸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거기뿐이었다. 복도에선 늘 누군가의 라면 냄새가 났고, 벽 너머 기침 소리가 내 방처럼 들렸다. 짐은 캐리어 하나와 박스 두 개. 서른네 해를 살았는데, 남은 게 그거였다.

방을 보러 갔던 날, 복덕방 주인이 굳이 계단까지 따라 나와 신신당부했었다.

"여기 계단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요~"

그때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계단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창문이 없다는 것도, 벽이 종잇장 같다는 것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누울 데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 비가 왔고, 우산이 없었고, 나는 젖은 몸으로 그 계단을 서둘러 오르고 있었다.

야근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렸을 땐 이미 쫄딱 젖은 뒤라 뛰는 것도 의미가 없었는데, 몸이 멋대로 뛰었다. 빨리 들어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씻지도 말고, 불도 켜지 말고, 그냥 눕자.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끝났으니까.

계단참을 도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였다. 피할 새도 없었다. 어깨가 맞부딪혔고, 젖은 발이 미끄러졌고—

세상이 뒤집혔다.

빗속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허공을 긁는 손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계단을 굴렀다. 어딘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 그 아가씨의 비명, 차가운 시멘트. 아래로, 아래로. 붙잡을 것을 찾아 허공을 긁던 손이 기억난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그 짧은 순간에, 이상하게도 평생이 지나갔다.

전단지 돌리던 교복, 편의점 야간 조끼, 도서관 책상에 엎드린 밤, 통장을 펴 든 밤 — 시기마다 옷차림이 다른 뒷모습 네 컷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던 날. 초등학교에서 돌아왔더니 거실에 낯선 남자들이 서 있었고,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 큰 어깨가 그렇게 작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짐을 싸서 밤에 사라진 엄마의 뒷모습. 자는 척하던 내 방문 앞에서 엄마는 잠깐 멈췄었다. 문을 열까 말까 하는 기척. 결국 열지 않았다. 나는 그 발소리가 현관을 지나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머니 집 문 앞에 맡겨진 어린 나. 눈칫밥. 참았던 것들. 갖고 싶다는 말, 가고 싶다는 말, 아프다는 말. 말하면 짐이 되니까 삼키는 법부터 배웠다.

새벽 편의점 카운터에서 졸다 깨던 열여덟의 나. 도서관 책상에 떨어진 코피를 휴지로 막던 스물둘의 나. 통장 잔고를 몇 번이고 다시 세던 수많은 밤의 나.

그래도 살았다. 악착같이 살았다. 겨우겨우 붙잡은 회사, 겨우겨우 마련한 전셋집. 이제 됐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 그리고 그마저 사라진 자리.

나는 참, 재수도 없지.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

으, 머리야.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얀 천장. 소독약 냄새. 어디선가 규칙적으로 삑, 삑, 하는 기계음. 병원이구나, 싶었다.

계단. 그래, 계단에서 굴렀지. 그 아가씨는 괜찮나.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아프지가 않았다. 어디 부러진 데도, 결리는 데도 없었다. 오히려 몸이 가벼웠다. 낯설게 가벼웠다. 서른 넘어서는 자고 일어나도 무겁기만 하던 몸이, 물에 뜬 것처럼 가벼웠다.

이상하네. 진통제를 얼마나 들이부은 거야.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손끝에 닿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결이 좋았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이상하다. 내가 최근에 트리트먼트를 했었나. 머릿결이 왜 이리 좋지.

미용실 간 지가 언젠데. 반년은 됐을 텐데. 돈이 아까워서 집에서 대충 자르고—

응?

그 손을 눈앞으로 가져온 순간, 나는 멈췄다.

팔목이 왜 이리 얇아.

내 팔이 아니었다. 하얗고, 가늘고, 힘줄 하나 없이 매끈했다. 손톱까지 곱게 다듬어져 있었다. 연한 분홍빛으로, 정성 들여.

병실에서 눈앞으로 들어올린, 힘줄 하나 없이 매끈하고 하얀 팔과 연분홍빛으로 다듬어진 손톱

나는 손톱을 기른 적이 없다. 키보드 치는 데 걸리적거리니까. 다듬을 시간도, 그럴 돈도 없었으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벌떡 일어났다. 팔에 꽂힌 링거 줄이 당겨졌다. 병실 한쪽 세면대 위에 작은 거울이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서워서인지, 이 다리가 낯설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거울 속에, 웬 여자가 있었다.

젊었다. 눈부시게 예뻤다. 이십 대. 그 여자가 나를 따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구야!!"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맑고, 어렸다.

거울 속 여자도 똑같이 소리쳤다. 손을 들면 손을 들고, 볼을 만지면 볼을 만졌다. 볼이 부드러웠다. 만지는 손끝도, 만져지는 볼도, 전부 남의 것 같은데 감각은 내 것이었다. 나였다. 이 낯선 얼굴이, 지금 나였다.

숨이 가빠졌다. 꿈이다. 꿈이어야 했다.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아픈 것까지 생생한 꿈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소독약 냄새까지 나는 꿈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곰곰이 생각했다. 계단. 부딪힌 어깨. 그 아가씨.

이 얼굴이었다. 어제 계단에서 부딪힌, 바로 그 여자였다.

같이 굴렀다. 같이 실려 왔을 거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여자의 눈으로 거울을 보고 있다. 이 여자의 목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럼.

"…그럼, 난 어디 있지."

나는 병실을 나섰다. 링거를 뽑았는지 매단 채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복도를 헤맸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간호사가 뒤에서 뭐라 불렀지만 듣지 않았다. 환자분, 환자분, 하는 소리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었다.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것처럼.

층을 올랐다. 표지판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알았다. 저쪽이라는 걸.

중환자실.

면회 시간이 아니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복도 쪽으로 난 유리창에 매달리듯 붙었다.

유리창 너머 침대 하나. 기계에 매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여자. 머리는 푸석했고, 팔목은 굵었고, 얼굴엔 피로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입에 물린 관, 가슴에 붙은 패치들, 그 여자 대신 오르내리는 기계의 숫자들.

서지안.

침대 발치에 걸린 이름표까지 읽을 것도 없었다. 삼십사 년을 매일 거울에서 본 얼굴이다. 남들은 못생겼다고도 예쁘다고도 안 하는, 그냥 피곤해 보인다는 말만 듣던 얼굴. 야근하고 돌아온 밤마다 세수하면서 마주치던, 나였다. 진짜 나.

서른넷의 나는, 지금 저기서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기계가 대신 숨을 쉬어주면서.

그런데 나는, 여기 이렇게 서 있었다. 남의 몸을 하고. 남의 손바닥을 유리에 대고.

중환자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댄 뒷모습과 그 너머 흐릿한 침대

이상했다. 눈물도 안 났다. 저기 누운 저 여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남 일처럼. 저 여자, 어떡하냐. 이제 좀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러다 그게 나라는 사실이 한 박자 늦게 덮쳐 왔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유리창에 기댔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게 새어 나왔다. 그래. 나는 참 재수도 없지. 전세금을 날릴 때도, 계단에서 구를 때도, 그리고 죽는 것조차 이렇게, 어중간하게.

간호사들이 달려와 나를 병실로 데려갈 때까지, 나는 그 유리창 앞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

병원을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거리였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물비린내 나는 바람이 젖은 아스팔트 위를 지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물웅덩이마다 고여서, 길바닥에도 불빛이 겹으로 떠 있었다.

발이 가는 대로 걸었다. 이 몸의 집이 어딘지도 모른다. 내 고시원으로 갈 수도 없다. 그 방 열쇠는 저 중환자실에 누운 여자의 가방 안에 있을 테니까. 갈 데가 없다는 건 익숙한데, 돌아갈 몸이 없다는 건 처음이라, 자꾸 웃음이 샜다.

지나가던 사람 둘이 나를 흘끔 돌아봤다. 처음엔 내 꼴이 이상해서인 줄 알았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이 얼굴이 예뻐서 보는 거였다. 서른네 해 동안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하필 이럴 때.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비 갠 밤거리를 정면으로 걸어오는 낯선 얼굴과 그를 돌아보는 행인 둘

얼마나 걸었을까.

늘 다니던 길이었다. 고시원과 지하철역 사이, 하루 두 번씩 반년을 오간 길모퉁이. 편의점과 닫힌 세탁소 사이, 아무것도 없던 그 벽.

그리고 길모퉁이에, 어제까지 분명 없던 문이 하나 있었다.

밤 길모퉁이에 난 나무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불빛

낡은 나무문. 그 위에 손바닥만 한 놋쇠 간판. 문틈으로 따뜻한 색의 불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저 문을 쳐다보지 않았다. 바로 앞을 지나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치, 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간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퀀타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기로 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 꼴이 됐는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주제에, 근거 따위 따질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낯선 다리로, 그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화 끝)

이전에 입력하신 정보가 자동으로 채워졌어요